전한 성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전한 성제는 전한의 12대 황제이다. 원제의 장남으로 기원전 51년에 태어나 기원전 33년에 즉위하여 기원전 7년에 사망했다. 즉위 전에는 부씨와 유강의 총애를 받던 원제에 의해 황태자 자리에 위협을 받기도 했으나, 원제 사후 황위에 올랐다. 즉위 후에는 외척인 왕씨 일족의 권력 강화와 조비연, 조합덕 자매에 대한 총애로 정사를 멀리했다. 결국 실질적인 아들을 두지 못하고 조카인 유흠을 후계자로 지명했으며, 급사한 뒤 조합덕이 자살하고 애제가 즉위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전한 원제의 황자 - 유강 (정도공왕)
유강은 후한 시대 원제의 총애를 받은 인물로, 산양왕에서 정도왕, 하간왕으로 봉해졌으며 황태자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성제 즉위 후 공왕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후에 애제 즉위 후 공황으로 추존되어 그의 삶은 정치적 함의와 함께 긍정적, 부정적 평가를 받는다. - 기원전 7년 사망 - 적방진
미천한 가문 출신으로 학문에 힘써 승상에 오르고 고릉후에 봉해졌으나, 엄격한 정치로 외척과 대립하다가 형혹성 출현을 이유로 자결을 명받은 전한 후기의 관료이자 학자이다. - 기원전 7년 사망 - 소의 조씨
소의 조씨에 대한 정보 부족으로 인해 소개를 작성할 수 없습니다.
전한 성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휘 | 류오 |
자 | 태손 |
시호 | 효성황제 (孝成皇帝, "효성스럽고 성공적인") |
묘호 | 통종 |
존호 | 황제 |
성 | 류 |
생년 | 기원전 51년 |
사망일 | 기원전 7년 4월 17일 (44세) |
사망지 | 장안 |
매장지 | 연릉 (延陵) |
부친 | 전한 원제 |
모친 | 효원황후 |
배우자 | 허과 효성황후 |
통치 | |
재위 기간 | 기원전 33년 8월 4일 – 기원전 7년 4월 17일 |
계승 | 전한 황제 |
이전 통치자 | 전한 원제 |
후임 통치자 | 전한 애제 |
왕조 | 한 (전한) |
연호 | 건시 : 기원전 32년 - 기원전 28년 하평 : 기원전 28년 - 기원전 24년 양삭 : 기원전 24년 - 기원전 20년 홍가 : 기원전 20년 - 기원전 16년 영시 : 기원전 16년 - 기원전 12년 원연 : 기원전 12년 - 기원전 8년 수화 : 기원전 8년 - 기원전 7년 |
2. 생애
성제는 즉위 후 환관 세력의 약화에는 성공했지만, 생모 효원황태후(왕정군)의 친가인 왕씨 일족이 조정에 깊숙이 관여하게 되었다.[5] 성제는 왕위에 올랐으나 자리가 불안정했고, 조례에도 나오지 않고 주색에만 빠져 있었다. 황태후 왕씨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황태후의 오빠 대사마 왕봉도 좋아하지 않았다.
소의 부씨는 봉지로 간 후, 손자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조비연과 조합덕을 양아공주의 집에 보내 성제의 눈에 띄게 했다. 조비연과 조합덕은 미모가 아름다웠고, 가무로 성제를 홀려 성제는 조씨 자매를 궁으로 불러들였다. 조씨 자매는 차례대로 성제를 모셨다.
어느 날 성제가 조합덕의 침상에서 급사했는데, 성제의 죽음에 많은 의문이 있었고 의심이 조씨 자매를 향했다. 성제가 급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합덕은 자살했다.[5] 사서에 따르면 성제는 주색을 즐겼으며, 특히 조비연·조합덕 자매를 총애했다.[4] 조자매는 성제가 다른 후궁과의 사이에서 얻은 황자를 살해했고, 얼마 안 되어 조비연은 성제의 총애를 잃었으나, 조합덕에게 총애가 향했다. 실질적인 아들이 없었던 성제는[5] 조카인 유흔(애제)을 황태자로 세웠다.
2. 1. 황제 즉위 전
감로 3년, 당시 황태자였던 유석과 그의 후궁 중 한 명인 왕정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 이 시기, 아버지 유석은 선제의 미움을 받아 폐태자의 위기에 놓였으나, 아들 유오가 태어났기 때문에 사태가 수습되었다. 선제는 아들의 탄생을 기뻐하며, 유오에게 "태손"(황태손이라는 정도의 뜻)이라는 자를 하사했다.기원전 47년 6월 17일, 원제는 그를 태자로 봉했다.[1]
원제에게는 왕 황후 외에도 총애하는 후궁인 부씨와 풍원이 있었는데, 이들은 각자 아들을 한 명씩 낳았다. 왕 황후는 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했고, 풍씨와는 대체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왕 황후와 부씨 사이에는 아들들을 원제의 후계자로 만들려는 경쟁이 벌어졌다.
황태자 유오가 성장하면서 원제는 유오가 황위 계승자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점점 더 불만을 품게 되었고, 부씨의 아들인 정도왕 유강에게 점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기원전 35년, 원제의 막내 동생인 중산왕 유경이 사망했을 때, 원제는 십 대의 황태자 유오가 충분히 슬퍼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특히 유오와 유경은 나이가 비슷하고 함께 자랐기 때문이었고, 유경에게 충분한 존경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황태자 유오의 가신이자 원제의 할머니의 친척이며 원제에게 존경받는 고위 관리인 사단은 황태자 유오가 원제 자신이 너무 슬퍼하는 것을 막으려 한다고 원제를 설득했지만, 불만의 씨앗은 뿌려졌다.
두 왕자들이 더 성장하면서 원제와 유강은 더욱 가까워졌다. 그들은 음악, 특히 북 연주에 대한 애정과 실력을 공유했다. 유강은 또한 높은 지성과 근면함을 보였지만, 황태자 유오는 술을 마시고 여자를 밝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원제가 심각하게 병들었을 때(기원전 35년경), 부씨와 유강은 종종 그의 병상에 소환되어 그를 돌보았지만, 왕 황후와 황태자 유오는 거의 소환되지 않았다. 병을 앓는 동안 원제는 유강을 후계자로 삼아야 할지 고려했다(분명히 부씨의 격려를 받았다). 사단의 중재만이 원제가 그러한 생각을 그만두게 했다. 기원전 33년 원제가 죽자 황태자 유오는 황위에 올랐다(성제로 즉위).
2. 2. 재위 기간
성제는 즉위 후 환관 세력의 약화에는 성공했지만, 생모 효원황태후(왕정군)의 친가인 왕씨 일족이 조정에 깊숙이 관여하게 되었다.[5] 사서에 따르면 성제는 주색을 즐겼으며, 특히 조비연·조합덕 자매를 총애했다.[4] 조자매는 성제가 다른 후궁과의 사이에서 얻은 황자를 살해했고, 얼마 안 되어 조비연은 성제의 총애를 잃었으나, 조합덕에게 총애가 향했다.실질적인 아들이 없었던 성제는[5] 조카인 유흔(애제)을 황태자로 세웠다. 수화 2년(기원전 7년)에 성제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죽음 직전까지 곁에 있었던 조합덕이 원인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효원황태후가 조사를 하려 했지만 조합덕은 자살했다.
성제의 치세 전반에는 대사마, 대장군, 령상서사였던 왕봉이 권력을 장악했고, 후반에는 외척 왕씨와 승상 적방진 등 관료 간의 정치 투쟁이 계속되었다. 지방에서는 소규모 반란이 빈발하는 등 한나라의 통치력 저하가 뚜렷해졌으며, 말년에는 적방진, 하무 등에 의한 제도 개혁이 이루어졌지만, 쇠퇴해 가는 한나라를 부흥시키는 데에는 실패했다.
2. 3. 최후
수화 2년(기원전 7년)에 성제는 갑작스럽게 사망했다.[5] 실자(실제 아들)가 없었기 때문에, 조카인 유흔(애제)을 황태자로 세웠다. 성제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죽기 직전까지 곁에 있었던 조합덕이 원인이라는 유언비어를 낳았고, 효원황태후가 자세한 조사를 하려 했지만, 조합덕은 자살했다. 황후였던 조비연은 애제가 즉위하면서 황태후가 되었지만, 성제의 황자를 살해했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그 권력은 겉치레에 불과하게 되었다.3. 가족 관계
4. 평가
성제는 주색에 빠지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왕씨 일족의 전횡을 초래하고, 한나라 쇠퇴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5] 성제의 치세 동안 한나라의 통치력은 약화되었고, 이는 훗날 왕망의 찬탈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성제는 숙부들을 신뢰하여 정부 요직에 임명했고, 왕봉(王鳳중국어), 왕상(王商중국어), 왕근(王根중국어), 왕음(王音중국어), 왕망 등이 군 최고 사령관을 역임하며 행정을 장악했다. 이들은 황제를 도우려 노력하기도 했지만, 제국의 이익보다는 자신들의 권력 확대에 더 관심을 두는 경우가 많았다.
성제는 이러한 권력 구조를 수정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기원전 24년, 성제는 왕봉 대신 풍야왕()을 임명하려 했으나, 왕봉의 압력으로 왕장을 처형하고 풍야왕을 해임했다. 성제의 치세 전반에는 왕봉이 권력을 장악했고, 후반에는 왕씨 외척과 적방진 등 관료 간의 정치 투쟁이 계속되었다. 지방에서는 소규모 반란이 빈발했고, 제도 개혁도 실패하여 한나라의 쇠퇴를 막지 못했다.
5. 기타
야사(稗史)인 비연외전은 성제와 조비연의 관계를 묘사한 일종의 소설로, 사실을 충실히 반영한 것은 아니지만, 후세에 성제의 인상을 결정짓는 역할을 했다.[4] 비연외전에 따르면 조합덕은 성제의 총애를 잃지 않기 위해 특수한 방중술로 성제를 섬겼으며, 방사 중에 성제가 급사했다. 이 죽음에 의문을 품은 효원황태후에 의해 조사가 이루어진 결과, 조합덕이 성제에게 정력제를 과다 복용시킨 것에 의한 중독사로 판명되었고, 그 책임을 지기 위해 조합덕은 자살했다. 자살 직전에 조합덕은 자신이 황제를 섬겨 과분한 총애를 받았고, 더 이상 후회할 것은 없다고 (「나는 제왕을 다리로 희롱했다. 여자의 본분,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말하며, 독을 마셨다고 전해진다.
시건국 2년(10년) 신의 입국장군 손건의 수레 앞에 나타난 무중이라는 인물이 스스로 성제의 낙인인 유자여라고 주장했고, 이에 격노한 손건에게 체포되어 처형된 사건이 있었다.
또한 신나라 말기에 한단에서 거병한 역술가 왕랑도 성제의 낙인인 유자여라고 칭하는 등 조자매가 살해했다고 여겨지는 황자들 중 난을 피한 황자가 존재한다는 민간 전설이 이 시기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6. 등장 작품
- 왕비 왕소군(2007년, 중국, 배우 불명)
- 황후의 남자: 장안, 후궁의 난(2008년, 중국, 배우: 런동린)
- 황후의 남자 ~기원을 넘는 사랑~(2015년, 중국, 배우: 가오타이위)
참조
[1]
문서
dingsi day of the 4th month of the 2nd year of the Chu'yuan era
Zizhi Tongjian
[2]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http://worldcat.org/[...]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3
[3]
서적
漢書』趙皇后(飛燕)伝
[4]
문서
趙合徳の名は稗史『[[飛燕外伝]]』に現れ、『[[漢書]]』等の史書には見えない
[5]
문서
趙姉妹が他の妃が生んだ複数の男子を殺めたとされる。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